그렇게 과거를 생각하며 한참을 상념에 잠겨있던 수태부잡수 선생을 리지가 깨운다.
리지 : 이 보십시오. 수태부잡수선생 도대체 액수토어가 무엇이냐 묻지 않소?
수태부잡수 : 인호배이선(人豪培異線)... 오호통제라!...
수태부잡수 선생은 무슨 고민이 있는지 평온했던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다시 상념에 빠져든다.
...
수태의 대답은 실로 놀라웠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수태가 학식에 있어서 굉장한 수준을 가지고 있는 변철보다 자신의 생각과 더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한에게 수태는 참 이상한 아이었다. 그것은 그 첫 만남부터 심상치 않았던 것이 이유일 것이다. 마을지주들의 자녀가 모이는 학당은 왠지 처음부터 수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수태는 본시 동네 왈패들과 어울려 칼싸움을 즐기고 학문과는 담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픽살(腷殺)’골이라는 부랑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도이수도리(島夷手刀利)’라는 오랑캐가 가지고 놀던 날카로운 칼을 만드는 천민이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태는 이 단도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겨하게 되었다.
지한선생이 수태를 처음 본 것은 지한이 이 마을을 지나게 되던 때이다. 검과 창 그리고 극과 마(馬), 기타 모든 병기에 관심이 많았던 지한선생이 ‘도이수도리’라는 단검의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짧고 간결하되 적의 심장에 꽂으면 단번에 사망한다는 날카롭고 매서운 끝 이음선. 지한선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단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픽살’골 어귀에서부터 이 단도를 가지고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혼자서 10명의 건장한 청년을 상대하는 어린 소년. 마르다 못해 피골이 상접한 이 소년이 건장한 청년에 맞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소년의 체구는 왜소했지만 그 눈빛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10명의 적을 맞이하는 다윗이 가질만한 눈은 아니었다. 어쩌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닥쳐있을지도 모르는 소년은 그 누구보다도 평온하고 차분한 눈빛으로 하나하나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치를 하였을까? 한 건장한 사내가 족히 소년의 키보다 커보이는 극(戟)을 소년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뒤이어 다른 사내들도 소년에게 검을 휘둘렀다. 합이랄 것도 없는 난전이었지만 소년의 눈빛은 동요함 없이 침착하게 무기들을 피해 나갔다. 그리고 소년이 몇 번이나 피했을까 소년의 단도는 극을 들고 있던 사내의 성대 앞으로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지한 : 멈추시오! 저는 일천현 출신의 ‘부비(浮費)’라 하오.
일동 경직된 자세로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본다. 이미 지한의 공적은 이곳까지 퍼졌기 때문에 두려움 반 존경의 마음 반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한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천한 이 몸 이치(理致)는 깨달아가고 있소. 사정을 이야기 하신다면 도움이 될 것이오.
이미 소년의 움직임에 속으로 두려워하던 청년 중 하나가 말하였다.
청년1 : 저희는 이곳 시장의 소사를 도맡아 하고 있는 청년들입니다. 요즘 시장의 물건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어 조사를 하던 차에 이 아이가 물건을 훔쳐가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저희는 이 소년을 붙잡아 그 물건을 내놓으라고 말을 하였지만 이 소년이 책을 주지 않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지한은 아직도 소년이 한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책을 그제야 발견하였다. 그것은 ‘피접본’이었다.
지한 : 그렇다면 그 책과 더불어 이곳 상점에 있는 모든 책값을 지불하겠소. 그러니 이만 물러들 가는 것이 어떻겠소.
청년들은 그제야 화가 풀린 듯 지한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소년을 무리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소년을 데리고 가 국밥을 먹이며 지한은 물었다.
지한 : 그 책을 정말 네가 훔쳤느냐?
수태 : 아닙니다. 저는 단지 그것을 읽고 돌려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지한 : 그래. 네가 학문에 관심이 많구나. 나와 같이 배워보지 않겠느냐?
...
그렇게 만나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지한은 수태의 눈빛에서 아직도 그날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수태는 여전히 말수가 없고 약해보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단도가 품어져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수태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온화하고 평온해 보인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그의 설득력이다.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도 발표를 할 때가 오면 그 누구보다도 기발하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좌중을 설득시킨다. 한번은 책에 온통 낙서가 되어 있어서 봤더니 한 장 한 장에 자기가 발표하고 싶은 그림을 넣어 동문들에게 보여주면서 설득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녹희아의 명을 받고 가장먼저 떠올랐던 것은 수태였다. 자신이 가르쳐주겠노라 데리고 왔던 수태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수태의 잠재적인 능력에 대한 궁금함이 더해졌기 때문인지라. 지한은 그렇게 머금은 미소를 거두고 제자들에게 입을 떼었다.
지한선생 : 그렇다. 수태의 말이 맞다. 직관을 따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너희들의 가슴, 그리고 너희들의 직관이야말로 너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 다른 이의 삶을 살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의견이 너희들의 목소리를 사라지게 하지 마라. 수태 너는 누가 뭐라고 수군거리든 너의 길을 가야한다.
왠지 모를 결연함과 비장함마저 드는 지한선생의 한마디 한마디였다.
지한선생 : 난 그동안 너무 쉬어서 다리가 굳을 지경이구나. 이제 세상을 위해 내 마지막 힘을 쓰고자 한다. 이제 내가 아끼는 너희들에게 이 책들을 선물하노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널리 이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한선생의 출사표였다. 지한선생은 그의 문무로 흑전단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었다. 지한선생은 자신이 재필하여 설명을 덧붙인 ‘피접본’을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당은 이내 훌쩍거리는 소리, 탄식하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두 사람 변철과 수태 중 변철에게 먼저 발걸음을 했다.
지한선생 : 변철아 너의 학문은 이미 세상을 드높이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제는 사람을 아끼는 방법을 배우거라. 무릇 정의로운 대지주라고 함은 소작농들에게 고충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들이 뭉쳐서 너에게 바른말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자이다. 잠시 잠깐 그들이 뭉치면 힘들어질지 모르지만, 그것을 해결하고 너 스스로가 발전할 때만이 참다운 결실을 맺는 것이다. 사람을 소중히 대하라. 착취하지 마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이 책을 주는 이유이다.
그러면서 지한선생은 자신이 쓴 반도책(叛徒)을 선물하였다. 훗날 변철의 아들 건휘가 악용하여 소작농을 착취하고 공방을 탄압하여 무기 제조의 신화를 이루어내게 되는 살성반도책의 원본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한선생은 수태에게 다가간다.
지한선생 :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하지 말거라. 너는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세상을 도모할 힘이 생기는 아이다. 능히 물에 낀 이끼마저 설득(樹苔部雜水 : 수태부잡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아이다.
그러면서 지한선생은 수태에게 ‘아이반(芽理搬:싹의 이치를 전함.)’을 선물하였다. 훗날 수태가 ‘아이반나노’, ‘아이반도치’ 와 ‘아이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응용서를 내게 한 원본서책이었다. 그러면서 지한선생은 말했다.
지한선생 : 이 책의 내용은 받아드리는 사람에 따라서 천양지차이로 바뀌게 된다. 무궁한 능력의 소유자가 이 서책을 가지고 있거든 능히 세상을 다스릴만한 힘을 쥐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세상을 악의 소굴로 빠트릴 위험을 가지게 된다. 너는 너의 소양을 잘 갈고 다듬어 이 책의 진정한 주인이 되도록 하여라.
그리고 지한선생은 그 제자들과 함께 마을 어귀를 한 바퀴 산책하면서 돌담 하나, 기와 하나에 담긴 추억을 담소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중을 받고 지한은 마을을 떠났다. 생부현을 떠나는 지한의 마지막 뒷모습이 세상의 패권을 쥐고 있는 녹희아를 몰락시키고 바야흐로 영웅호걸이 난세를 평정하겠다고 전국을 호령하던 기나긴 ‘수마두본’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 (4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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